글로벌 시장에서 고립된 ‘열등생’ 취급을 받던 중국 반도체 산업의 도약이 매섭다. 미국의 제재와 견제가 오히려 기술 자립을 재촉하면서 중국이 인공지능(AI)칩과 메모리 반도체 분야 등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큰손인 미국 애플뿐만 아니라, 최근엔 휴렛팩커드(HP)·에이수스·에이서 등 글로벌 피시(PC) 업체들까지 중국산 메모리 도입을 추진하는 등 시장 동향도 심상치 않다.
당장 세계 최대 반도체 순수입국이었던 중국의 위상에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중국 세관당국인 해관총서가 최근 공개한 무역통계를 보면, 올해 1~7월 중국의 반도체(집적회로) 누적 수출액은 2160억2천만달러(약 305조5천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9.5% 급증했다. 이 기간 수출 물량도 전년 동기 대비 6.2% 늘었다. 중국의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올해 1~7월 8.6%로 지난해보다 3.5%포인트 확대됐다.
자국 내에서 생산 능력을 키운 중국 기업들이 인공지능발 칩 공급 부족이 심해지자 범용 제품 중심의 틈새시장을 적극 공략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메모리 가격 폭등으로 수출로 벌어들이는 이익이 급증하며 반도체 자립을 위한 재투자 실탄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수출에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물량이 포함된다는 。을 고려해도, 중국 반도체 생태계의 자생력이 부쩍 강화되고 있는 셈이다.
실제 한국이 글로벌 주도권을 쥐고 있는 메모리 분야에서 중국 기업들의 생산 역량은 가파르게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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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중국 최대 메모리 기업인 창신메모리(CXMT)의 디(D)램 생산 능력(웨이퍼 기준)은 지난해 1분기 200만장에서 올해 1분기 295만장으로 47.5%나 불어났다. 연간 생산 능력도 지난해 3천만장에서 내년엔 3600만장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공정 자체의 고도화 속도도 빠르다. 창신메모리의 구형 공정인 20나노급(2z㎚) 공정 비중은 지난해 38%에서 내년엔 2%대로 대폭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나노는 반도체에 그리는 회로 폭의 단위로, 1나노는 10억분의 1m를 의미한다. 숫자가 작을수록 정교한 공정으로, 성능과 전력 효율이 올라간다. 창신메모리는 같은 기간 구형·범용 공정 비중을 줄이는 대신, 10나노급 1세대(1x㎚) 공정을 62%에서 93%까지 늘릴 예정이다. 10나노급 2세대(1y㎚) 공정도 올해부터 일부 양산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낸드플래시 메모리 기업인 양쯔메모리(YMTC)도 선두주자 추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회사의 연간 웨이퍼 생산량은 지난해 1776만장에서 올해 2010만장, 내년에는 2496만장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또 기존 주력 제품이었던 128단 구형 낸드플래시 비중이 내년부터 사실상 사라지고, 232단과 270단 등 200단 이상 제품을 중.적으로 생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수 앞 숫자는 비트 단위로, 같은 칩 크기에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을 나타낸다.
물론 한국 기업과의 격차는 여전히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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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가 10나노급 6세대(1c) 디램 공정을 기반으로 한 고대역폭메모리 7세대(HBM4E) 샘플을 이미 주요 고객사에 공급했고, 낸드플래시의 경우 하이닉스는 321단 낸드 제품 비중을 국내 생산 능력의 50% 수준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 기업들의 추격 ‘속도전’과 이를 떠받치는 내부 산업 생태계의 강화다. 단순 칩 완제품뿐 아니라 소재·부품·장비 등 공급망 전반에서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최근 미국의 수출 통제에 대한 자구책으로 액침식 심자외선(DUV) 노광장비 자체 개발 등에 속도를 내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엑스(X)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중국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초미세 반도체 생산의 핵심인) 노광장비 문제를 푸는 데 훨씬 가까이 와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성장세는 중국 정부의 전방위적 지원과도 맞물려 있다. 중국 중앙정부는 2014년부터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이른바 ‘빅펀드’를 조성해 반도체 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해왔다. 2024년 출범한 3기 펀드까지 합친 규모는 약 6800억위안(약 140조원)에 이른다. 세제 지원도 적극적이다. 중국 정부는 28나노미터 이하 반도체 공정 기반의 생산 시설엔 최대 10년간 기업소득세를 면제한다. 이 밖에도 연구개발비 추가 공제나 국산 장비·소재 육성 정책, 인력 지원을 동시에 강화하며 산업 전반의 자립 기반을 키우고 있다.
국책 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대외연)이 국제연합(UN) 무역통계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중국은 2022년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 분야(수출액 기준)에서 글로벌 수출시장 。유율 1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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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4.0%에 불과했던 세계 시장 。유율이 2022년 18.4%로 급증하며 미국(9.4%)은 물론 일본(5.8%), 한국(3.9%)을 모두 앞질렀다. 첨단 공정용 핵심 소재와 고부가가치 부품에선 미·일 기업들이 높은 기술력과 시장 지배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범용 소재·부품에선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는 셈이다.
정형곤 대외연 선임연구위원은 “과거엔 중국의 반도체 수출이 늘면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 중간재 수출도 함께 늘었지만, 지금은 중국 내부 생태계가 구축되면서 이런 연결 고리가 많이 약해졌다”며 “중국은 세계 최대 반도체 수요 시장을 기반으로 대규모 자체 생산과 수출이 모두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의 반도체 자립은 첨단 기술 산업 공급망 구축을 넘어서, 미래 패권 경쟁의 핵심인 인공지능 산업 발전과도 시너지를 내고 있다. 중국 최대 기술 기업인 화웨이가 자체 인공지능 연산 칩 ‘어센드’를 기반으로 미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며 중국 반도체 자립을 이끌고 있다. 또 딥시크, 문샷 에이아이 등 중국의 인공지능 기업들은 제한된 반도체 자원의 활용을 극대화하는 가성비와 효율성 중심의 인공지능 모델들을 속속 출시하며 미국과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위원은 “중국은 반도체 자립을 위해 꾸준히 투자해왔고, 액침식 심자외선 노광장비 개발 역시 그런 노력의 결과”라며 “중국도 이미 범용 디램을 생산하고 있고, 낸드플래시도 300단 수준까지 올라왔다. 기술 격차가 크지 않은 만큼 가격경쟁력 등을 갖추면 범용 메모리 시장 판도는 빠르게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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